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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하면 헛장사…기업들 고환율 시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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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1. 전자기기 생산 업체인 A사는 요즘 매주 열리는 경영전략회의 때 ‘1호 안건’으로 환율 이슈를 올린다. 이 회사 임원은 7일 “해외 거래선과 달러·엔·위안화 등으로 거래하는데 올해 들어 유독 원·달러 환율이 급등(원화가치 하락)해 수익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고 있다. 재무팀과 국제금융팀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있다”고 말했다.

#2. 화학소재를 만드는 또 다른 대기업 B사는 최근 환율 구간별 경영 시나리오를 마련했다. 달러당 원화값이 1500원을 넘어서면 원료 수입선을 일본에서 중국 등으로 돌릴 계획이다. 그나마 위안화 가치가 덜 올라서다. B사 관계자는 “달러화 급등 때 우왕좌왕할 수 있어 시나리오를 짜놓고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원화 대비 달러 강세 현상이 이어지면서 기업 경영이 암초를 만났다. 올해 초 달러당 1269.03원에서 시작한 원화값은 2월 2일 1224.78원으로 연중 최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계속 출렁거리고 있다. 지난 4일 외환 시장에서 달러당 원화값은 1322.95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통상 달러 가치가 낮아지면 원화값은 오르는데, 원화 가치는 되려 떨어졌다(원달러 환율 상승).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 인덱스는 지난달 기준 101.5다. 3월 말(102.14)보다 0.6% 하락했다. 최근 주요 기업의 1분기 실적 발표 때는 “환율과 금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대답이 빠지지 않았다.

‘킹달러’는 국내 기업에 약(藥)이자 독(毒)이었다. 수출 비중이 높은 반도체·자동차·조선 산업은 고환율을 만나면 순익이 늘어난다. 반면 에너지와 항공 등 외화 부채가 큰 산업군은 환차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환율 공식’이 깨지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맞물린 고환율은 독으로 작동하고 있다. 예컨대 달러·유로화 거래 비중이 큰 삼성전자는 달러당 원화값이 5% 내리면(환율 상승) 순이익이 2586억원(지난해 말 기준) 늘어난다. 하지만 지난 1분기에는 주력 수출품인 메모리 반도체 판매량이 급감하며 고환율 혜택을 보지 못했다.

최근 수주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조선업도 실속 없기는 비슷하다. 일정한 환율로 외화를 사고파는 통화선도 계약 때문이다. HD현대중공업은 131억 달러(약 17조원) 규모의 통화선도 계약을 맺고 있는데 약정 환율은 달러당 1222원이다. 평균 계약기간은 내년 7월까지인데, 지금 같은 1350원대 고환율이 내년까지 이어져도 ‘킹달러 효과’를 누리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반면 1분기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낸 현대자동차는 환율 상승에 따른 재미를 톡톡히 봤다. 이 회사는 달러당 원화값 5% 내리면 순이익이 1115억원 늘어난다. 연말까지 1350원대 달러 환율이 이어질 경우 순이익은 2000억원 정도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와 항공 분야는 직격탄을 맞는 격이다. 원유와 리스 등 각종 비용을 달러로 지급해서다. 정유 업계 1위 SK이노베이션의 경우 달러 등 주요국 환율이 5% 오르면 순이익이 488억원 감소하는 구조다. 외화 부채가 30억 달러(약 3조9800억원)에 이르는 대한항공은 달러당 원화값이 10원 내리면 300억원을 추가 부담해야 한다.

기업의 환율 시름은 하반기까지 이어질 전망이 많다. 최근 원화 약세 흐름은 무역수지 적자 영향이 커서다. 우리은행은 최근 “비관적인 수출 경기 전망 탓에 원화 위험 자산에 대한 수요 부진이 우려된다”며 1차적 심리 저항선인 달러 당 원화 가치 1350원선이 무너질 경우 1400원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더 큰 문제는 기업의 기초 체력이 약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기 침체에다 재고 증가로 재무구조가 갈수록 악화해서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업 입장에선 고환율, 고금리라는 두 개의 퍼펙트 스톰(동시다발적 악재)을 겪어야 하는 셈”이라며 “유동성 위기에 대응하면서 미래 필수 자산을 챙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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