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자전거 여행기] "윤발이 오빠, 국영 오빠~" 그 시절을 소환하다
호기심이 재산이다. 호기심으로 시작해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고 길을 떠난다. 이동 수단으로 자전거를 택했다. 작은 길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길이 없거나 멀어도 접어서 대중교통편에 실으면 된다.
목적지는 홍콩. 인터넷에 많은 정보가 있지만 와 닿지 않는다. 자전거 여행자는 도로를 보는 눈이 다르다. 아무리 책상 앞에서 설계해 봐도 현실감이 없고 머리가 아프다. 일단 현지에 가야 정리가 될 것 같아 시작점만 결정하고 떠났다.
홍콩공항에 내려 공항철도를 이용해 구룡역으로 갔다. 가장 저렴한 숙소다. 침사추이 뒷골목 호텔. 미로 같은 통로를 더듬어 16층까지 올라가서 안내를 받아 들어간 작은 방이 3만5,000원. 6일간의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호텔이었다.
마음이 끌리는 곳은 타이람 컨트리파크. 홍콩관광청 홈페이지에는 등산 코스로 추천했지만 사진을 보니 자전거로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철을 타고 롱핑역에서 내려 타이람 지역공원을 찾는 것이 첫 번째 미션이다.
버스를 타라고 안내되어 있지만 홍콩의 촘촘한 대중교통망에서 정류장을 찾는 일이 더 번거롭다. 10km 거리를 자전거로 달렸다. 스마트폰 지도가 알려준 코스는 합리적이지 않았다. 길을 묻기를 여러 차례, 미니벨로를 타고 나온 친절한 홍콩 남자들이 타이람 근처까지 데려다 주었다. 미로 같은 복잡한 길에서, 안전한 길과 샛길로 3배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거친 시멘트 포장으로 된 능선과 임도는 MTB코스를 겸하고 있었다. 낙타등마냥 심한 오르내림을 수없이 반복했다. 굽이 돌면 바다가 보이고, 저수지가 보이고, 산군이 보이고, 느닷없이 빌딩숲도 보였다. 숲속에 혼자 있어도 고립된 느낌은 없었다.
도대체 홍콩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나같이 사람들 얼굴에 생기가 없다. 무심하며 표정이 없고, 외부에 관심도 없는 듯하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간혹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해도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도 없다. 옆으로 휙 말 없이 지나가 버리기도 한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홍콩의 산과 바다를 다 둘러볼 욕심에 해변으로 목적지를 잡고 달렸다. 숙박비 비싸기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홍콩이지만 걱정 없다. 내 배낭에는 텐트가 있으니까. 마침 추석 전날이라 골든비치에는 사람들이 500명쯤 모여 있었다.
중국 전통행사로 촛불과 풍등을 켜는데 촛농 오염을 막기 위해 초는 금지해서 배터리로 빛을 내는 막대를 사용한다. 해안 화장실에는 더운물이 나오는 샤워장까지 있다. 사람이 많은데도 큰 소리 없이 가족끼리 차분하다. 아이들만 모래놀이에 신나서 떠들 뿐이다.
군중 속에 묻혀 밤을 지내고 다음날은 홍콩이 자랑하는 해안 자전거길로 갔다. 타이와이 전철역에서 시작되는 길에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달린다. 대부분 초입 자전거 대여점에서 빌려서 탄다.
그 사람들이 지쳐 돌아갈 4km쯤 지점부터 진짜 홍콩스러운 경관이 펼쳐진다. 강과 바다와 뒤로 배경을 이루는 고층빌딩, 수상스키가 달리고 버스 역할을 하는 페리들이 오간다. 해양경찰을 보면 옛날 홍콩영화 생각이 난다. 내가 홍콩을 여행지로 선택하며 뭔지 모를 친밀감을 느낀 데는 1990년대 홍콩영화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영웅본색 주인공과 함께했던 내 청춘
마침 이 타이와이 자전거길 중간에 홍콩 문화유산 박물관이 있다. 홍콩의 가장 큰 문화유산이 '홍콩영화' 아니겠는가. 주윤발, 유덕화, 장국영… '영웅본색' 시절에 함께 주인공이었던 내 젊음이 오버랩되고 정말 내가 홍콩에 와 있다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무뚝뚝한 홍콩이지만 공원에 자전거여행자를 위한 화장실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자전거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 칸이 있으며,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와 정수기까지 있다. 그 옆엔 편의점, 해안에는 파빌리온(정자)이 있다.
관리하는 직원에게 "여기서 야영을 해도 되냐"고 묻자 그러라고 고개를 크게 끄덕여 준다. 마침 자전거 짐받이의 볼트가 빠져 분실되어 곤란한 상황이었다. 공원 자전거 보관대에 버려진 자전거의 볼트를 빼서 사용할 수 있었으니, 적재적소에서 어려움이 모두 해결되었다. 문득 홍콩에 정이 갔다.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자 픽시 자전거를 타는 청소년들이 자전거 묘기 연습을 한다. 그들의 스피커에서는 홍콩의 랩과 가요가 쿵쿵 울린다. 텐트를 쳤지만 더워서 들어가 잘 수 없다. 바깥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 모기와 싸우며 잠을 청했다. 정말 의도치 않은 노숙이다.
이른 새벽,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출발이다. 홍콩 여행을 결정하면서부터 벼르던 빅토리아피크로 간다. 수직에 가까운 경사로 산을 오르는 트램 자체가 홍콩의 명물이라는데… 나는 자전거로 오르고 싶었다.
산 많은 나라 코리아, 그중에서도 강원도의 험산준령을 꿀떡꿀떡 오르던 내가 도시 한복판 해발 400m 높이도 안 되는 산쯤이야 못 오르겠나라는 호기다. 센트럴역으로 가서 든든하게 연어샐러드 정찬과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트램 시작점으로 갔다.
그런데 허걱, 경사가 심상치 않다. 그보다는 차도에 갓길도 없고 액셀을 힘껏 밟아 엔진 굉음을 내며 올라가는 차들 틈에서 자전거로 올라가는 게 위험하다. 작전상 다른 길을 찾는다. 도보 코스를 검색해서 올라갔다. 자전거를 밀면서 걸어 올라가는데, 코가 땅에 닿을 정도다.
남의 일에 무심하고 표현도 없는 홍콩 사람들조차 걱정과 위로를 보내준다. 서양인 커플의 파이팅에 내가 지금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를 신음처럼 말하며 올라갔다. 그래도 결국은 다다라 3.7km의 피크 둘레길을 돌면서 홍콩의 전 방향을 둘러보는 것으로 보상받았다.
그길로 다시 내려가다가는 앞으로 고꾸라지겠기에 홍콩대학 쪽 '모닝트레일'이라는 숲길로 내려갔다. 급경사 등산의 과로, 더위, 높은 습도로 무척 피곤했다. 쾌적한 곳에서 한숨 푹 자고 싶었으나 도시 한가운데에는 정말 잘 곳이 없었다. 최하 30만 원으로 검색되는 호텔에서 몇 시간 자고 나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문득 아침에 공원에서 본 동남아 여자들이 생각났다. 100명? 200명? 많은 여자들이 나무그늘, 빌딩그늘 아래 무리지어 있었다. 그들도 어디선가는 잠을 잘 테고 값싼 도미토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입주 가정부나 유모로 일하며 주말이면 퇴근하고 월요일 아침에 출근한다고 한다.
거리에 박스 깐 동남아 유모들과 함께 단잠을
센트럴 전철역으로 가서 밖으로 나오니 역시 그녀들이 있다. 어디서 자냐고 물으니 바로 그 자리에서 잔다고 한다. 둘러보니 박스를 깔고 세워서 편한 자리를 만들어 자는 사람도 있고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많은 사람들도 여기서 자는데, 나도 그 틈에 끼어 아침까지 시간을 보내면 되겠다 싶었다.
여인들이 내게 박스를 내주고 간식도 나누어 준다. 한 아가씨는 "당신, 집이 없어요?"라고 묻는다. 자전거에 보따리를 싣고 다니는 노숙자 여인으로 보였나보다. 박스가 그렇게 보송보송하고 시원한지 처음 알았다. 이틀간 비닐매트와 침낭을 깔고 잘 때는 홍콩의 높은 습도 때문에 끈적거리고 불쾌했는데, 박스를 깔고 앉으니 너무 쾌적했다. 스르륵 행복감이 밀려올 지경이었다. 홍콩 중심지의 극강 소음 속에서 잠이 들 수 있다는 것도 내게는 기록적인 일이었다.
귀국까지 하루의 시간이 남았다. 드래곤백이라든지 섹오비치 등 산 능선을 잇는 코스를 달리고 싶었으나 밤에는 공항으로 가야 했다. 동선이 단순해야 한다. 그렇다면 페리로 마카오를 갔다 오자. 마카오라는 지명 역시 영화나 드라마에서 독특한 이미지로 등장했기에 궁금했다.
밀집 대도시 홍콩과 지척인데도 마카오 공기는 매우 깨끗했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황금빛 장식의 거대한 카지노와 호텔들. 어느 도시에서도 보지 못한 노골적인 황금과 잭팟의 이미지다. 유적지로 소개하는 몇 개의 유럽식 교회 흔적으로는 관광객에 대한 서비스가 미흡하다 여겨졌는지 새로운 광장, 상가, 테마거리는 중세유적 콘셉트로 짓고 있었다.
홍콩영화의 큰형 주윤발이 할리우드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마카오 해적왕으로 출연했었다. 그 연관성이 은근히 재미있었는데, 페리 터미널에서 인터넷 뉴스를 보니 69억인가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단다. 내 청춘이 깃든 홍콩의 추억, 마카오의 골드머니, 마카오 해적 주윤발의 무소유 발언까지. 홍콩 자전거 여행의 유쾌한 해피엔딩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짐을 풀어보니 자전거가 여기저기 휘어 있었다. 조금만 손보면 다시 튼튼한 내 버디buddy(친구)로 일어설 것이다. 이방인으로 살았던 닷새에서 돌아오니 내 집이 오히려 낯설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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