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에서 한 고객이 정문에 붙은 안내문을 읽고 있다. 안내문에는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SVB를 폐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AFP연합뉴스
지난 1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에서 한 고객이 정문에 붙은 안내문을 읽고 있다. 안내문에는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SVB를 폐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AFP연합뉴스
지난 10일 오후 3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굳게 닫힌 정문 앞에는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SVB를 폐쇄한다는 안내문만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잠시 후 직원 세 명이 작은 상자를 하나씩 들고 나왔다.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할 말이 없다”며 자리를 피했다.

“스타트업 투자자의 절반 이용”

"232조원 돈줄이 48시간 만에 끊겼다"…실리콘밸리 '줄도산' 공포
1983년 설립된 SVB는 그동안 신용이 부족한 스타트업의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했다. ‘벤처 대출(venture debt)’이라는 실리콘밸리에 특화된 틈새 상품을 최초로 내놓고 이 지역 스타트업에 유동성을 공급했다. 신용을 쌓지 못한 스타트업들은 일반 시중은행에서 대출받기 힘들었지만 SVB를 찾아가면 투자금 유치 규모와 비례해 벤처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최고로 평가받는 VC가 투자한 스타트업에 더 많은 대출을 해주면서 실리콘밸리 VC와도 밀접한 관계를 쌓았다. 지난해 말 기준 SVB의 총자산은 2090억달러, 총예금은 1754억달러 규모였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과 VC 가운데 절반 이상이 SVB와 거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테크·헬스케어 벤처기업 중에선 44%가 SVB 고객이다. SVB는 2009년 이후 약 2300억달러 규모의 투자 유치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브라이언 강 노틸러스벤처스 대표는 “SVB의 파산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어서 충격이 크다”고 말했다.

13일 은행 거래가 재개되면 혼란이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FDIC는 ‘샌타클래라 예금보험국립은행(DINB)’이라는 법인을 설립해 SVB가 보유한 예금을 모두 이전하고 자산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SVB의 지점 17곳은 일단 13일 문을 열고 고객별로 예금자보호한도인 25만달러까지 지급할 예정이다. 하지만 SVB 총예금 1754억달러 중 86%인 1515억달러가 예금자보호한도 초과 예금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스타트업 업계 최악의 빙하기 올 수도

은행 예금이 묶여 당장 운영 자금이 부족한 스타트업은 다음주 급여 지급도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미국 기업들은 통상 매달 15일과 말일, 한 달에 두 번 급여를 지급한다. 바로 다음주에 월급을 줘야 하는 기업이 많다. 월급을 주지 못하면 노동법 위반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SVB 파산은 지난해 자금 가뭄에 고전하던 스타트업에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스타트업 생태계는 2021년 돈이 넘쳐나던 시기를 거쳐 지난해 가파른 금리 인상과 함께 자금난에 처했다. 미국벤처캐피털협회(NVCA)에 따르면 2021년 4분기 VC 거래 규모는 939억달러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2022년 들어 1분기 거래 규모가 798억달러로 내려앉았고, 4분기에는 362억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절반 이하로 줄었다.

자금줄이 마른 스타트업들은 기업가치를 깎아가며 자금 조달에 나서기도 했다. SVB 파산 이후 신규 투자를 유치하려는 스타트업들은 위기에 처했다. 한 VC 관계자는 “VC들은 기존에 투자한 스타트업을 우선적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다”며 “초기 단계 스타트업들은 투자자 찾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관투자가들이 벤처 투자에 더 신중해지면서 신규 펀드를 설정하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선 2008년 금융위기 때에 버금가는 충격이 올 수 있으며 실리콘밸리가 주도해 온 혁신에 브레이크가 걸릴 것이란 우려가 퍼지고 있다.

샌타클래라=서기열 특파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