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넘어 창작마저…속속 허물어지는 ‘인간 고유의 영역’

김은성 기자

③ AI의 일자리 침공, 안전지대는 없다

백신·신약 개발 시간 획기적 단축
불과 이틀 만에 책 한 권 펴내거나
기사 작성·법률 상담 등도 현실화
예술 분야서도 사람 밀어낼 가능성
AI 활용 능력 따른 불평등 문제도

중세시대 흑사병부터 스페인독감,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등 앞서 인류는 대유행병에 시달리면서도 백신 같은 적절한 대처법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는 달랐다. 단기간 백신 개발로 피해를 줄이는 데 일조했다. 스타트업에 불과했던 미국 제약사 모더나가 대표적이다.

모더나의 성장 뒤에는 ‘메신저 리보핵산(mRNA)’이라는 유전물질을 분석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시스템이 있었다. mRNA는 신체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단백질 생성 방법을 세포에 가르쳐, 특정 바이러스 노출 시 항체를 형성하도록 유도한다. 모더나는 최적의 mRNA 서열을 설계하기 위해 AI를 이용해 막대한 양의 유전자 데이터를 분석하고 식별했다. 백신 후보 물질이 나온 후 임상시험 데이터 분석에도 AI가 쓰였다.

통상 백신이나 신약을 개발하는 데는 8~20년가량의 시간이 걸린다. 수년간의 시간이 걸려도 상용화 허가를 받는 비율은 10% 미만이다. 모더나는 AI를 활용해 백신 개발 기간을 11개월로 단축해 코로나19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모더나의 혁신은 AI와 인간의 협업으로 인류에 도움을 준 대표 사례다.

보건의료 산업은 향후 AI가 적극 도입될 산업으로 꼽힌다. 블루오션(미개척 시장)인 만큼 성장 잠재력이 높은 것도 있지만, 사회적 효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어서다. AI 경쟁을 주도하고 있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오래전부터 수십조원을 쏟아부으며 공을 들이는 이유다.

한국도 첫걸음을 뗐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지난 15일 에임메드의 불면증 디지털 치료기기 솜즈를 국내 1호 ‘디지털 치료기기’로 승인해 새로운 의료 기술의 시대가 열렸다. 디지털 치료기기는 약물은 아니지만 의약품처럼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향상 시킬 수 있는 소프트웨어다. 애플리케이션(앱)·AI·가상현실 등이 치료제로 활용된다. 솜즈는 의사가 환자를 상대로 진행하는 인지치료를 앱으로 구현한 치료기기다. 병원에서 불면증 진단을 받은 환자만 쓸 수 있다. 환자는 앱이 제공하는 수면 교육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다. 솜즈로 효과를 보지 못하면 약물치료로 넘어간다. 의사 처방과 치료 행위가 있고, 치료 효과가 검증됐다는 점에서 단순히 건강관리를 하는 디지털 헬스케어와는 다르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디지털 치료기기 허가로 한국에서도 AI 같은 혁신 기술을 의료 분야에서 상용화할 수 있는 물꼬가 터졌다고 평가한다.

가장 진화된 생성형 AI인 챗GPT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만큼, AI 혁신 기술을 다양한 기존 업무들에 어떻게 융합할 것인지에 대한 제도적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가짜뉴스 등의 한계로 챗GPT가 사람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기술이 진화해 다양한 분야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에는 큰 이견이 없다.

특히 초거대 규모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분석하는 챗GPT의 능력은 진료·임상 데이터가 쌓일수록 성과를 낼 수 있어 보건의료 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다.

기본 학습 수준은 이미 검증됐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연구에 따르면 챗GPT가 작성한 의학 논문 초록 50편이 표절 검사 프로그램을 모두 통과하고, 의학 전문가들도 제출된 초록의 32%를 걸러내지 못했다. 이런 능력은 자기공명영상(MRI) 진단 등의 보조 수단이나, 질환을 예측하는 등 예방치료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챗GPT가 쓰고 편집과 교열까지 한 책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 스노우폭스북스 제공

챗GPT가 쓰고 편집과 교열까지 한 책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 스노우폭스북스 제공

챗GPT가 대형 언어모델로 학습을 한 만큼 관련된 직업군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오는 22일에는 챗GPT가 직접 쓰고 편집과 교열까지 한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이라는 책이 출간된다. 출판사 스노우폭스북스에 따르면 챗GPT는 인쇄와 출간 작업을 제외한 집필·번역·교정·교열 등 고유의 편집 작업을 30시간 만에 끝냈다. 번역은 네이버의 번역 AI인 ‘파파고’ 도움을 받았다. 인간이라면 최소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릴 일을 이틀로 앞당긴 것으로, 출판 시스템에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기존 데이터를 학습해 책을 쓴 만큼 저작권 문제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논문 표절, 보고서 대필 등 홍역을 치르는 교육업계는 이미 태풍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챗GPT 열풍을 교육개혁의 계기로 삼겠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지난 16일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챗GPT로 가장 타격을 많이 입는 곳은 한국같이 지식 전달에 집중하고 암기력만 요구하는 나라”라며 “아이들이 답하는 것이 아니고 질문하도록 교육체계를 만들어야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큰 도전이 눈앞에 있다”고 강조했다. 교육부는 전문가들과 논의를 통해 ‘AI 교과서’ 개발 등 디지털 기반 교육 혁신 방안을 수립해 발표할 예정이다.

초반에는 베끼기 등의 부작용이 불가피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개인의 학습 속도와 적성에 따라 맞춤형 교육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빠르게 정답을 알려주는 획일적인 기존 교육에 챗GPT가 균열을 낼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이미 미국과 영국 등에선 AI와 대화를 잘하는 ‘프롬프트(명령어) 엔지니어링’이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다. AI에 질문하는 수준에 따라 업무 성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향후 AI의 활용 차이가 지식 격차를 야기하는 불평등 이슈가 생길 수 있어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성을 갖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던 기자와 변호사 등의 직업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챗GPT로 기사를 쓰는 언론사가 생겼고, 영국의 법률회사는 챗GPT에 판례 데이터를 축적해 판결 결과를 예측하는 서비스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챗GPT를 접목한 무료 상담 서비스가 나온다.

이미지를 생성하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 ‘미드저니’로 그린 ‘사무실에서 글 쓰는 로봇’ 그림.

이미지를 생성하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 ‘미드저니’로 그린 ‘사무실에서 글 쓰는 로봇’ 그림.

인간의 마지막 보루로 여겼던 창작 영역도 AI가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게 되면서 예술 분야에서도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챗GPT를 개발한 오픈AI는 다음 모델인 GPT-4와 별개로 이미지·비디오 생성형 AI 출시도 준비하고 있다. 어지간한 그림이나 동영상은 AI가 만들어줄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 저렴한 비용으로 단기간에 광고 등을 생성해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서도 활약할 가능성이 있다.

김세희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그간 AI 기술 발전으로 노동의 비용이 낮아졌다면, 이미지·비디오 생성형 AI는 (사람의) 창작 비용까지 낮추는 ‘특이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대응도 빨라지고 있다. 박윤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은 최근 고려대 인공지능 연구 데이터센터 개소식에서 “이달 말이나 다음달 초 큰 변화(챗GPT 열풍)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성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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