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 미술 컬렉터 탐구 보고서
"다들 좇는 그림은 매력 없지 않아요? 저는 굳이 말하자면 마이애미 루벨 컬렉션 같은 초대형 컬렉션을 보며 수집해요. 미국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보겔이나 루벨 부부 컬렉터가 미래의 피카소나 앤디 워홀을 발굴했던 시도가 흥미롭죠."
신촌 이면도로변 수장고(작품창고)에서 만난 노씨는 스페인 출신 스트리트 아티스트 에드가 플랜스(46)의 애니멀 히어로즈 대형 연작 앞에서 여유롭게 웃었다. 2019년 한눈에 반해 샀던 이 작가 작품은 그새 가격이 너무 급등해 이젠 살 엄두도 못 낸다고 토로한다.
가장 마음에 들어 수장고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던 캐나다 아티스트 데이비드 알트메드(49)의 조각 '포털 건축가'(2020)는 울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산업과 예술'에 대여 중이었다. 공사장 기물을 연극배우처럼 세팅한 설치작품은 이스탄불 비엔날레 출품 작품으로, 오랜 기다림 끝에 받았다.
지난해 9월 프리즈 서울로 부풀었던 국내 미술 시장이 경매 중심으로 가라앉고 있지만, 동시대 작가들에게 열광하는 MZ 컬렉터들 덕분에 버티고 있다. 1994년생인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이나 1987년생 빅뱅의 탑 등 인기 스타를 비롯해 평범한 직장인들도 열정적으로 미술품을 구입하고 있다.
일부 40대 컬렉터도 비슷한 취향을 보이지만, MZ세대는 특히 동시대 젊은 신진 작가들에게 우호적인 편이다.
백운아 이길이구갤러리 대표는 "기성 컬렉터들은 전시장을 찾으면 작가 이력부터 보는데, MZ세대는 이력은 보지도 않더라"면서 "젊은 신진 작가들은 인스타그램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잠재적인 컬렉터들과 직접 소통이 가능하도록 홍보 전략을 바꾸고 있다"고 설명했다. 온라인 플랫폼으로 눈여겨본 동년배 작가들이 전시하거나 아트페어에 참여하면 한정판 운동화를 구매하듯 오픈런(개점 전 대기)도 불사한다.
최근 페레스프로젝트 서울에서 개인전을 연 멕시코 출신 화가 바이롤 히메네스(39)의 오프닝 파티에 참석한 컬렉터 중 MZ세대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이날 1993년생 김효은 씨는 본인의 하얀색 샤넬 핸드백을 작가에게 건네더니 뚜껑 안쪽 면에 작가 서명 겸 드로잉을 받아 탄성을 자아냈다. 본인이 좋아하는 아티스트로부터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방을 만드는, 그만의 특별한 의식(ritual)이다.
노씨는 "원래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인데 미술품 수집을 통해 작가나 컬렉터들과 사교할 수 있었고 삶의 폭이 넓어졌다"면서 "함께 소통할 동년배나 후배가 늘어 그들에게 컬렉팅 조언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2020년 아트부산에서 소장품 전시를 열었는데 유망한 신진 작가들 작품을 선보여 기성 컬렉터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은혜 페레스프로젝트 아시아 디렉터는 "MZ세대는 보통 부모가 컬렉터인 경우가 많지만, 언어 장벽이 없다 보니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해외 작가와 작품에 대해 먼저 알고 연락해 구매 의사를 밝히는 사례가 많다"고 밝혔다.
안정적인 전통 기업에서 일하다 신생 테크 기업으로 이직했다는 한 30대 남성은 "코로나19 확산 때 주식과 코인으로 돈을 벌어 분당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그림 3점을 샀다"며 "미술 강의를 듣고 컨설턴트의 조언을 받아 운 좋게 유망 작가 작품을 구매했는데 앞으로는 더 살 여력이 없을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홍익대 미술대학 재학생 A씨(25)는 "할아버지께서 고미술, 한국화 수집을 오래 하셔서 관리도 할 겸 관련 전공을 택했는데, 컬렉션을 확장하고자 동시대 해외 미술품 수집도 병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20대 중에는 지난해 미술 광풍 속에서 이우환 판화 되팔기로 짭짤한 수익을 거둔 사례도 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와 함께 '한국 MZ세대 미술품 소비자 분석 연구'를 수행한 주연화 홍익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 교수는 "MZ세대는 미술품을 구매할 때 기존 컬렉터보다 '공간 인테리어'를 목적으로 소비하는 사례가 많고, 본인 취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높은 외국어 능력과 정보 검색 능력을 바탕으로 국내외 딜러와 갤러리 네트워크를 빠르게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는 주요 아트페어와 경매회사 고객 13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심층 인터뷰를 통해 Z세대(1996~2005년생), M세대(1980~1995년생), X세대(1965~1979년생), B세대(1946~1964년생)를 비교한 결과다.
실제 MZ세대 상위 구매자(3년간 1억원 이상 구매)는 해외 갤러리 구매 비율이 17%에 달했다. 상대적으로 MZ세대는 다른 세대보다 국내 갤러리와 국내 온라인 경매 이용 비중이 낮은 편이다. 다만 '현장 아트페어' 비중이 높았다. 또 응답자 중 70%가 투자를 구매 시 주요 요인으로 꼽았을 정도로 미술품을 투자로 인식했다. 심지어 구매 시점부터 작품에 따라 보유 기간을 정해놓고 구매하며, 상위 구매자 두 명 중 한 명은 재판매한 경험이 있었다.
특히 Z세대는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운영하는 젊은 작가들의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작가들과 직접 소통하고, 작품을 구매하는 사례가 많았다. 작품 구매 인증샷도 놓치지 않는다. 컬렉터들 간 교류도 활발해 각자 소장품을 소개하며 서로를 격려한다. 국내에서는 7월에 열리는 '어반브레이크'가 인스타그램에서 폴로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선보여 젊은 수집가들이 입문하기 좋은 아트페어로 거론된다.
손엠마 리만머핀 서울 디렉터는 "일찍이 신기술로 창업해 자수성가한 사람이나 의사 등 전문직 MZ세대 컬렉터들은 평일 휴무일이나 이른 퇴근길 갤러리에 들러 최신 동향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특히 특정 작가에게 꽂히면 연구자 수준으로 탐구해 갤러리스트와 대화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미술품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국내 대표 사립미술관인 리움은 최근 MZ세대 큐레이터(전시기획자)를 대거 보강해 이들이 학예사의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젊은 전시기획자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할 뿐 아니라 다른 갤러리 경험 없이 독자적으로 갤러리를 여는 사례도 늘고 있다.
2020년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갤러리 '실린더'를 연 노두용 디렉터도 1991년생이다. 흥미롭게도 1호 전속 작가는 영국 모델 출신 1990년생 트리스탄 피곳이다. 지난해 9월 키아프 플러스에 참가했는데 작품이 완판돼 화제를 모았다. 노 디렉터는 "국적과 상관없이 성장시킬 자신이 있는 작가를 소개하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고 밝혔다. 동년배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려운 용어를 뺀 전시 소개로 특화한 그는 영국 유학파다. 서울 외곽에 마치 '섬'처럼 갤러리를 열었지만 온라인으로 전 세계와 연결돼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한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