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의 기업본색
※대한민국보다 대한민국 기업이 더 유명한 세상입니다. 어느새 수 십조원을 굴리고 수 만명을 고용하는 거대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밖에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상영의 ‘기업본색’은 기업의 딱딱한 보도자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공시자료의 수많은 숫자 안에 가려진 진실을 추적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마이크로소프트 로고. 연합뉴스 자료사진

마이크로소프트 로고.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은 기후문제를 산업으로 보지만 유럽은 책임감으로 접근한다. 반면, 일본과 한국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1년을 쪼개 미국과 유럽, 한국에서 활동하는 국내 주요 대기업 한 임원은 탄소 중립 등 기후 문제에 대한 주요국의 접근 방식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기후 문제를 유망 산업으로 본다는 표현처럼 미국은 최근 가장 큰 투자금을 모은 스타트업이 기후테크 기업일 정도로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기후(Climate)와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인 기후테크는 수익을 창출하면서 탄소배출 감축과 기후적응에 이바지하는 혁신 기술을 의미한다.

실제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와 같은 ‘큰 손’들은 기후테크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2030년까지 탄소 네거티브, 즉 자사가 배출하는 것보다 더 많은 탄소를 환경에서 제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MS는 약 3년간(2020년~2023년 1월) 기후테크 기업에 투자한 금액이 5억6400만 달러(약 7300억원)에 달했다. MS가 자사의 기후혁신기금을 통해 투자한 기업만 26곳이다.

MS는 이미 2019년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달성했다. 그런데도 기후환경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RE100을 달성한 MS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기후테크 투자하는 큰 손

MS의 탄소배출 감축 노력은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가운데 하나는 MS에 제품이나 원자재를 납품하는 기업이 배출하는 탄소를 줄이는 노력이다. MS가 펴낸 ‘환경 지속가능성 보고서 2022’를 보면 직접 탄소 배출량(스코프1·2)을 1년 전에 비해 22.7%나 줄였다.

스코프 1은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를, 스코프 2는 제조 공정에 쓰이는 전력 때문에 배출되는 탄소를 말한다. MS는 그동안 전력구매계약(PPA) 체결 등을 통해 스코프 1과 2를 줄여왔다. MS 본사에서도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지열 발전을 통해 냉·난방을 한다. 그러나 MS 전체 탄소 배출량의 96%를 차지하는 간접 배출량(스코프3)은 되레 0.5% 증가했다. 아무리 탄소 감축을 위해 투자를 늘리더라도 MS에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이 탄소를 줄이지 않으면 헛수고가 되는 셈이다. 2025년부터 스코프 3 공시 의무도 부과되는 만큼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열 에너지 센터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열 에너지 센터

스코프3 단계에서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MS는 직접 외국 정부와 협의에 나설 때도 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주 레드먼드의 MS 본사에서 만난 멜라니 나카가와 MS 최고지속가능성책임자(CSO)는 최근 대만 정부와 만났던 사례를 언급하며 “무탄소 에너지원을 통해 전기를 생산하는 것뿐 아니라 잘 송전될 수 있도록 전력망도 개선한다. 아시아 시장과 같이 전력시장이 폐쇄된 경우 다양한 정책 결정자들과 협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실제 재생에너지는 화력·원자력 등 대용량 발전기와 달리, 소규모로 각 지역에 흩어졌기 때문에 배전선로나 변전소·변압기 등의 장치를 보강하는 등의 투자가 필요하다.

또 다른 MS의 탄소 감축 방향은 CF100(무탄소에너지 100% 사용)이다.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지 못한 부분을 사후에 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구매 등으로 해결하는 RE100과 달리, CF100은 실시간으로 수소나 연료전지, 재생에너지 등의 무탄소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RE100을 이미 몇 년 전에 달성한 구글도 실시간 무탄소 비중은 67%에 그친다. 그런데도 대규모 투자를 이어간 데는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나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기후 장벽’이 공고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전력소비서 9%만 재생에너지로 조달한 삼성전자

반면, 국내 기업은 RE100 이행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경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에너지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국내 전력사용량(2만1731기가와트시·GWh) 중 재생에너지 사용(1959GWh) 비율은 9.0%에 그친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전 세계에서 사용한 전력 중에 재생에너지를 통해 생산한 전력 비중이 30.7%라고 밝힌 것에 비하면 국내에서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은 훨씬 저조한 수준이다. 삼성전자의 국내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은 올해 8월까지 13.3%로 전년보다 소폭 올랐지만 여전히 지난해 전 세계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에 비해서는 한창 밑돌고 있다.

서울 서초구 삼성 사옥에 삼성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권도현 기자

서울 서초구 삼성 사옥에 삼성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권도현 기자

RE100에 가입했지만 국내 재생에너지 사용량을 에너지공단으로부터 인증받지 않는 기업도 상당수다. 현대자동차와 기아, 현대모비스는 2021년 7월 RE100 가입을 선언했지만 지난해는 물론, 올해 8월까지 국내 재생에너지 사용을 인증받지 않았다.

재생에너지 조달 방식도 편중됐다. 해외 주요 기업들은 PPA를 통해 재생에너지를 공급받지만 대다수 국내 대기업은 녹색 프리미엄 구매에 의존한다.

녹색 프리미엄은 한국전력에서 전력을 조달할 때 웃돈을 지급하고 재생에너지를 사용한 것으로 인정받는 제도로, 실제 재생에너지의 생산·활용을 확인할 수 없어서 ‘그린워싱(위장 환경주의)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업들도 발전사와 정해진 계약 기간 사전에 협의한 가격으로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을 구매하는 PPA를 선호하지만 높은 가격 때문에 쉽게 선택하지 못한다.

기업들은 국내에서 RE100을 이행하는 데 어떤 점을 가장 걸림돌로 꼽을까.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 주최로 열렸던 ‘산업계 탄소중립 컨퍼런스’에서 황호송 삼성전자 상무는 “PPA 상황이 여의치 않다”며 “약 20TWh에 달하는 삼성전자의 전력소비량을 충족할 만한 재생에너지 공급 물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기연구원이 RE100 관련 기업 44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가장 시급한 문제로 재생에너지 물량 확보(23.5%)를 꼽았다. 기업들로선 세계 표준으로 눈앞에 닥쳐오는 RE100을 맞추고 싶어도 국내에선 재생에너지가 없어서 못한다는 뜻이다.

조달에 드는 비용을 낮추는 점도 과제로 꼽힌다. 일본은 2020년부터 PPA 발전설비 비용 3분의 1을 보조해주며, 대만은 재생에너지발전기업의 망 이용료를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에 따라 지원한다. 반면, 국내는 기존 산업용 전기요금보다 더 비싼 PPA 전용 요금제 도입을 추진했다가 산업계 반발에 막혀 표류한 상태다.

기업들이 RE100 이행에 어려움을 겪자 정부는 재생에너지 공급을 늘리고 비용을 낮추기보다 손쉬운 원자력발전을 들고나왔다. 한국처럼 재생에너지 여건이 열악한 국가와의 협력을 통해 RE100이나 CF100보다 문턱을 대폭 낮춘 CF(무탄소)연합 출범을 예고한 것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다른 국가로부터 전력조달이 쉬운 유럽과 달리, 한국은 섬처럼 고립됐다”며 “목표가 탄소를 줄이는 것이라면 원전도 폭넓게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서 ‘기후장벽’을 쌓고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국가나 주요 기업들의 지지를 끌어낼지 아직은 미지수다.

애드리안 앤더슨 MS 재생에너지 전력구매 총괄은 탄소 절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국 기업과의 협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물리적인 페널티(처벌)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탄소 저감을 위한 노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 기업에는 흥미가 떨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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